[우즈벡생활] 현지어, 현지어, 현지어!!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던 나는 기왕이면 중앙아시아에서 봉사하고 싶었다. 중앙아시아 5개국 중에 현재 코이카가 단원을 파견하는 나라는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두 나라뿐인데 사실 민족어의 영향력이 큰 우즈베키스탄보다는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는 키르기스스탄이 좀 더 관심이 갔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우즈벡어를 배울 운명이었나 보다. 마침 코이카에 지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무렵 111기 수요 요청 목록에는 키르기스스탄이, 112기 수요 요청 목록에는 우즈베키스탄이 있었는데 111기에 합격할 자신이 없어 면접을 포기하고 112기에 다시 지원했고 이렇게 지금 우즈베키스탄에 와 있으니 말이다. 만약 111기에 우즈베키스탄에 갈 한국어 교육 단원을, 112기에 키르기스스탄에 갈 한국어 교육 단원을 뽑았더라면 나는 지금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가 아닌 키르기스스탄의 어떤 작은 도시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우즈베키스탄은 이중언어 국가이다. 그러나 러시아어와 민족어를 둘다 공용어로 지정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은 민족어인 우즈벡어만을 공용어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즈베키스탄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간에 우즈벡어만으로 소통이 가능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중년 이상의 우즈벡계 사람들이나 러시아 슈꼴라(러시아어로 수업하는 초중등학교) 를 졸업한 우즈벡 학생들의 경우 러시아어와 우즈벡어를 둘 다 유창하게 구사하지만 러시아어와 우즈벡어 중 하나만 아는 사람들도 많다. 러시아계 사람들은 나이에 상광없이 우즈벡어를 아예 못한다고 봐야 하며 고려인의 경우에도 소비에트 시절 교육을 받으신 분들은 우즈벡어를 아예 모르신다. 반대로 독립 이후에 태어나서 러시아 슈꼴라가 아닌 우즈벡어로 수업하는 학교를 나온 학생들은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우즈벡어도 잘 못하지만, 러시아어만 하는 현지인을 만나면 난감할 때가 많다. (물론 우리에게는 만국 공통어 바디 랭귀지가 있어 결국 하고자 하는 건 어떻게든 다 한다.)
코이카 단원들의 경우 현지어로 우즈벡어를 배우고 임지에 파견되고 나서부터는 파견 지역, 파견 기관, 파견 분야, 개인의 선호 등에 따라 러시아어, 우즈벡어, 카라칼팍어 중 하나를 선택해서 현지어 심화학습을 할 수도 있다. 현지어 심화학습 기간이 끝나더라도 개인적으로 사비를 들여 과외를 받기도 한다. 간혹 언어적으로 트인(?) 단원은 우즈벡어와 러시아어, 카라칼팍어와 러시아어 등 두 개의 현지어를 통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은 한 언어만 하기에도 벅차다. 나 역시도 현지적응훈련을 할 때까지만 해도 우즈벡어와 러시아어,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요즘 들어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요즘 러시아어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우즈벡어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는데 가끔 '아, 이거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어디다 써!!!'라며 울컥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즈벡어 공부를 이쯤에서 그만두고 러시아어를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동기 선생님들도 '우즈벡어 그만하고 (원래 하던) 러시아어 계속 공부해라.. 왜 안 하냐'고 하시는데 우즈벡어를 포기할 수가 없다.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건 오로지 나를 위해서고 내 (봉사) 활동에는 큰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 페르가나 시에는 페르가나 2번 학교처럼 러시아어를 수업 언어로 하는 초중등학교(마키탑)도 몇 개 있고 대부분의 고등학교(리쩨이, 콜리지)가 우즈벡어 반과 러시아어 반을 둘 다 가지고 있어서 내 수업을 듣는 중,고등학생 중에 러시아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러시아어 학교를 나오지 않은 페르가나 학생들이나 혹은 시골에서 페르가나 대학으로 유학(?) 온 지방 학생들의 경우 러시아어를 아예 모르는 학생들이 많아서 될 수 있으면 교실에서 모두가 아는 우즈벡어로 얘기하려고 한다. (물론 한국어 시간인 만큼 수업 시간에 한국어를 사용하려고 하지만 초급 학생들의 경우 수업 시간에 우즈벡어를 섞어서 한다.) 문제는 내가 교실에서 가장 (한국어는 잘하지만) 우즈벡어는 가장 못하기에 원활한 소통과 양질의 수업을 위해서 우즈벡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공부의 필요성은 그 누구보다 잘 아는데, 왜 이렇게 교과서만 펴면 잠이 오고 다른 짓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방학 동안 열심히 우즈벡어 공부해오겠다고 학생들한테 약속했는데.......